프로그램 열전(2): 한글과컴퓨터 아래아한글 2
한글은 국산 소프트웨어의 대명사로 국내 최대 판매량을 기록, 지난 1994년 서울시가 정도(定都) 600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제작한 타임캡슐에 들어간 유일한 컴퓨터 소프트웨어이기도 했다. 당시 들어간 제품은 한글 2.5버전으로, 서울시는 이 제품을 이용하여 당시 시대상을 기술해 디스크에 담아 2394년 개봉 예정인 타임캡슐에 다른 품목과 함께 담았다.
한글은 1995년 윈도우 95의 출시와 함께 또 한 번 전환기를 맞는다. 기존 DOS용 한글을 윈도우 95에 맞게 이식해야 했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안정성이 부족했지만 점차 개선해 나갔다. 1996년 출시된 한글 프로 96에 이어 97년 나온 한글 97은 당시까지의 한글을 집대성했다고 평가할 만하다. 이 시절부터 버전 명에 출시 년도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이어지는 한글의 기본 기능과 UI가 완전히 자리 잡은 것도 97에 와서다. 동시기 삼성전자의 훈민정음, 포스데이타의 일사천리 등 다양한 윈도우용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이 출시돼 한글의 아성에 도전했지만 이미 국민 워드프로세서로 자리잡은 한글의 점유율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90년대 후반 IMF 외환위기로 인해 이찬진을 비롯한 한글과컴퓨터 창립멤버와 회사의 영원할 것 같았던 전성기에도 위기가 찾아왔다. 지금보다 소프트웨어의 저작권 인식이 약한 시절이었다. 불법복제가 성행한 탓에 매출규모가 들쭉날쭉했고 이를 타개하기 위한 사업 다각화 시도가 대부분 실패로 돌아가 경영난에 빠져들었다. 특히 개발초기부터 암호를 거는 등의 복제방지를 시도했지만 대부분 출시되자마자 방지장치가 풀려 복제품이 범람했다.
결국 한글과컴퓨터 경영진은 1998년 6월 15일 마이크로소프트의 자금유치를 위해 한글 차기작의 개발을 포기하겠다는 충격적인 발표를 했다. 그러나 한글이 주저앉도록 버려두기엔 점유율과 함께 ‘우리 소프트웨어’라는 국민정서도 무시할 수 없었다. 워드프로세서의 대표로 꼽히는 마이크로소프트 워드가 세계 시장을 장악하고 있지만 유독 한국에서만 고전했던 이유는 한글 때문이다. 이를 본 많은 IT 업계 젊은이들이 ‘제2의 한컴’을 꿈꾸었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사람들은 한글의 사업 포기를 더더욱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한글과컴퓨터의 이런 결정에 안타까움을 느낀 사용자들은 ‘아래아한글 지키기 국민운동본부’를 결성, 한글의 지속적 개발을 지원하기 위한 캠페인을 벌였다. 이 캠페인은 한컴에 1만 원 투자하기(국민주 운동), 불법 복제 소프트웨어 근절, 소프트웨어 정품 구매하기 등 범국민 운동으로 이어졌다. 또 국민운동본부는 한글과컴퓨터에 100억 원 규모의 긴급 자금을 투자했다. 한글은 이미 단순한 워드프로세서 그 이상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결국 한글과컴퓨터 측은 마이크로소프트 산하로 들어가기로 한 결정을 번복하고 독자적 운영방안 모색에 나섰다. 얼마 후 97을 기반으로 출시된 한글 815 특별판은 그런 경영개선 노력의 일환이었다. 외환위기로 인해 수많은 업체가 도산하고 ‘한강의 기적’ 자존심이 속절없이 무너지던 시절이었다. 광복절 날짜에서 가져온 버전 이름은 당시 한글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인식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준다. 1개당 1만 원의 파격적인 가격을 책정한 815 특별판은 수백만 장이 팔려나가며 실적 개선에 기여했다.
일련의 소동 후 과도기의 실패작에 가까웠던 한글 워디안을 거쳐 2001년 가을 히트작 한글 2002가 발매된다. 윈도우로 치면 비슷한 시기에 나온 XP에 비유할 수 있는, 더욱 강력해진 편집 기능을 등에 업은 2002는 SE(Second Edition)로 개량되며 더욱 폭넓게 쓰였다. 2002년 광복절에 나온 2002SE는 워드, 파워포인트를 비롯한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프로그램과의 폭넓은 호환성을 갖추고 훈민정음 등 다른 워드프로세서와의 호환성을 강화했다. 매크로나 상용구 등 개인 사용자가 자신에 맞게 설정해 둔 데이터를 저장해서 다른 PC에 그대로 옮길 수 있는 기능도 추가한 2002SE는 오랜 시간 공공부문 PC를 지배했다.
이와 함께 제품설치 시 사용자의 하드웨어 정보 및 제품번호의 조합을 통해 생성된 인증코드를 사용자가 발급받아 입력하는 윈도우 XP와 비슷한 정품인증방식도 도입하여 불법복제를 차단했다. 하지만 워드의 본격적인 돌출에 맞선 한글 프로그램의 강화는 이후 진행된 부실한 업데이트와 맞물려 점점 국제적 환경과 분리되는 갈라파고스화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어두운 면도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