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열전(1): 아타리가 쏘아올린 거대한 공, PONG
게임은 인류가 즐겨온 역사 깊은 유흥이며 인류가 존재하는 한 절대 사라지지 않을 중요한 콘텐츠이기도 하다. 컴퓨터 관련 기술의 발달 이전까지 게임은 오프라인으로만 존재했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오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게임 메이커 아타리가 1972년 출시한 게임 퐁(PONG)은 개인용 컴퓨터 보급에 한발 앞서 비디오 게임의 무궁무진한 발전 가능성을 보여준 신호탄이라 할 만하다.
퐁의 탄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아타리의 창업주 놀란 부쉬넬이다. 전자기기 제조사에서 일하던 그는 1961년 개발된 게임 ‘스페이스 워’를 통해 텔레비전 수상기를 이용한 게임의 잠재력에 눈을 떴다. 필요한 기술을 익힌 후 1971년 첫 작품인 ‘컴퓨터 스페이스’를 내놓았다. 그러나 플레이 방법이 어려워 상업적으로는 실패했다. 이에 부쉬넬은 좀 더 쉽고 친근한 게임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동료인 테드 데브니, 래리 브라이언과 함께 1972년 아타리를 창업하여 본격적인 비디오 게임 개발에 나섰다. 바둑 용어의 일종인 아타리는 일본어로 '단수’(아다리)라는 뜻이다. 3개의 선이 한데 모여 상승하는 듯한 심벌 디자인은 후지산을 형상화한 것으로 그래픽 디자이너 조지 오퍼먼의 작업이다.
아타리의 첫 게임을 위한 부쉬넬의 원래 구상은 라켓으로 공을 주고받는다는 단순한 탁구 게임에 가까웠다. 그러나 개발을 맡은 엔지니어 알 알콘은 오리지널 아이디어를 한층 발전시켰다. 라켓의 각 부분 어디에 공이 맞는가에 따라 공이 날아가는 각도가 달라지게 설정했고 공이 점점 빨라지도록 만들었다. 실제 탁구와 더욱 유사하도록 다듬은 것이다. 라켓은 양쪽에 설치된 작은 노브를 통해 움직일 수 있었다. 알콘은 전작에 없던 음향효과도 넣었다. 공을 치면 군중이 환호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렇게 완성된 게임에는 플레이 방법만큼이나 간단한 ‘퐁’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탁구와 관련된 더욱 유명한 이름은 핑퐁이지만 저작권 문제로 절반을 떼어냈다.
부쉬넬과 알콘은 日 히타치의 흑백 TV를 안에 넣고 외부 케이스를 제작하여 게임기의 형태를 갖춘 후, 근처 술집에 프로토타입 게임기를 설치하여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다. 한 게임기에 한 게임밖에 없던 시대였는데도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고장이 났다고 해서 확인해 보니 전자 회로 이상이 아니라 단지 사람들이 투입한 동전의 무게를 버티지 못한 것이었다는 일화는 지금도 회자된다. 술집에 와서 주문은 안 하고 게임만 하려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1972년 11월 정식 출시된 퐁은 수많은 아류작을 양산하며 천문학적인 대박을 터뜨렸다.
부쉬넬은 이외에도 아타리에서 많은 시도를 했다. 그 중 퐁과 연결되는 대표적인 발명이 퐁을 1인용 게임으로 만든 브레이크아웃(1976)이다. 라켓과 공을 활용하는 것은 퐁과 같지만, 상대방과의 대전이 아니라 쌓인 벽돌을 깨면서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간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오늘날의 관점으로는 별것 아닌 아이디어지만 비디오 게임이라는 개념 자체가 낯설던 당시엔 실로 혁신이었다. 브레이크아웃은 애플의 공동 창업주인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과의 인연으로도 유명하다. 워즈니악은 훗날 자서전에서 브레이크아웃을 통해 PC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퐁을 가정에서 즐길 수 있게 하려는 작업도 이어졌다. 1975년 출시된 가정용 퐁에는 홈퐁(Home pong)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불법 복제를 막기 위해 아타리 기술진이 개발한 전용 칩이 장착됐고 퐁의 상징과도 같은 원형 조작 노브가 양쪽에 달렸다. 플레이는 집의 TV 화면에 기기를 연결함으로써 가능했다. 실질적인 가정용 게임기의 시작인 홈퐁 역시 크게 히트했다.
여러 조치에도 불구하고 퐁의 브랜드 이미지는 물밀듯 쏟아지는 불법 복제와 아류작, 값싼 열화판의 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점점 희석되어 갔다. 개발 주역인 놀란 부쉬넬은 1978년 워너 사에 아타리를 매각하고 얼마 후 회사를 완전히 떠났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퐁이 열어젖힌 비디오 게임 시장은 10년 후 과열 경쟁으로 인한 '아타리 쇼크'로 일시적으로 주춤할 때까지 한동안 전성기를 맞았다. 그리고 비디오 게임, 소위 전자오락은 잇따라 출현한 다른 명작 게임들을 통해 하나의 장르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그 열풍은 한국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