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가의 게임기 흥망성쇠: 메가드라이브, 새턴, 드림캐스트
복수의 경쟁자가 있는 모든 산업에는 1인자 아닌 2인자 혹은 그 아래의 경쟁사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2인자로 평가받는 회사의 제품이 모든 면에서 1인자에 불리한 것은 아니다. 몇몇 중요한 약점과 정책 상의 실패 때문에 밀렸을 뿐 1인자가 닿을 수 없는 고유의 영역을 개척한 경우도 많으며, 해당 제품을 사용했던 유저 사이에서 나름의 추억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콘솔 게임기 시장에서는 일본 세가(SEGA)를 그런 사례로 꼽을 수 있다.
1960년 ‘일본 오락 물산 주식회사’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세가는 격투 액션게임인 베어너클, 그리고 고슴도치를 모티브로 하여 지금도 인지도 높은 소닉 더 헤지혹 시리즈 등의 명작 타이틀을 제작하며 게임 개발사로 승승장구했다. 또 1980년대 말까지 닌텐도와 함께 콘솔 하드웨어 시장의 양대 산맥으로 꼽혔다. 하지만 하드웨어 부문에서는 결국 닌텐도를 넘어서지 못했다. 90년대 들어서는 후발주자의 신제품에도 치이며 철수하는 비운을 겪었다. 세가 하드웨어 사업의 흥망성쇠를 함께한 주요 모델로 메가드라이브, 새턴, 드림캐스트를 들 수 있다.
메가드라이브(1988)는 아케이드 게임 시장에서 상당한 점유율을 올리던 세가가 가정용 게임기 부문에서도 성공을 이어가기 위해 선보인 야심작이다. 1983년 출시한 첫 모델 SG-1000이 라이벌 닌텐도에서 낸 희대의 히트작 패미컴으로 인해 크게 빛을 보지 못했기에, 후속 모델인 메가드라이브에는 16비트 CPU를 탑재하여 8비트 CPU를 지닌 패미컴의 성능을 크게 뛰어넘고 서드파티 개발사도 보강했다.
메가드라이브는 좋은 모델이었다. 그러나 구형 게임기인 패미컴과의 경쟁에서 재미를 보지 못했다. 닌텐도가 〈슈퍼마리오 브라더스 3〉, 〈파이널 판타지 3〉 등의 킬러 타이틀을 잇따라 발매하면서 메가드라이브의 판매를 방해했기 때문이다. 2년 후인 1990년 동등한 스펙을 지닌 슈퍼패미컴이 나오자 메가드라이브는 더욱 궁지에 몰렸다. 그나마 북미 시장에서는 슈퍼마리오 시리즈 못지않은 팬덤을 확보한 〈소닉 더 헤지혹〉(1991)과 다양한 마케팅으로 닌텐도의 판매량을 추월하며 절반의 성공을 거뒀다.
세가 측은 메가드라이브가 거둔 성과를 바탕으로 16비트를 넘어 32비트 CPU를 탑재한 후속 모델 새턴(Saturn)으로 입지를 다지고자 했다. 그러나 이번엔 예상치 못한 라이벌이 새로 나타났다. 가전업계의 거인 소니가 1994년 내놓은 플레이스테이션(PlayStation)이 그것이다. 새턴과 플레이스테이션은 32비트 CPU를 지녔고 CD-ROM을 저장매체로 삼았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초반에는 오랫동안 노하우를 축적해 온 새턴이 유리했다.
그러나 라이벌을 의식하여 이런저런 장치를 추가한 새턴은 플레이스테이션에 비해 내부 구조와 게임 개발이 훨씬 복잡하여 서드파티 개발사의 참여가 어려운 구조를 갖고 있었다. 게임 업계의 트렌드로 부상한 3D 그래픽의 구현도 어려웠다. 9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무게추는 플레이스테이션으로 크게 기울었다. 닌텐도가 내보낸 닌텐도64도 플레이스테이션의 아성을 넘보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5세대 게임기 시장의 왕좌는 닌텐도도 세가도 아닌 소니에게 돌아갔고 새턴은 조용히 단종됐다.
절치부심한 세가는 1998년 후속 게임기 드림캐스트(Dreamcast)로 재기를 노렸다. 보통 때라면 준수한 성능과 디자인을 지닌 드림캐스트가 실패작으로 기록될 확률은 거의 없었다. 가격이 나쁘지 않았고, 동시기 세계 주요 스포츠 구단 스폰서로 참여하는 등 마케팅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예전부터 해외축구를 즐겨 보던 팬이라면 2000년대 초반 영국 프리미어리그 아스날 FC의 유니폼에 새겨진 Dreamcast 로고타입을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플레이스테이션이 문제였다. 2000년 출시된 플레이스테이션 2는 전작 이상의 히트를 기록했다. 설상가상으로 2001년에는 마이크로소프트까지 가세하여 엑스박스(Xbox)로 얼마 되지 않는 파이를 깎아 먹었다. 복합적인 어려움에 직면한 세가는 결국 드림캐스트를 마지막으로 하드웨어 부문에서 완전히 철수하고 만다.
철수 이후 한동안 암흑기를 보낸 세가는 2020년 창립 60주년을 맞았다. 그리고 꾸준한 IP 개발을 통해 해당 년도 약 272억 엔에 달하는 영업이익을 내며 건실한 회사로 부활했다. 세상에는 영원한 성공도 영원한 실패도 없다. 콘솔 게임기 시장 자체가 건재한 만큼 세가 역시 언제든 돌아올 수 있다. 그런 기미가 엿보이는 모델이 2020년 출시한 ‘게임기어 미크로’다.
1990년 출시한 휴대용 게임기인 ‘게임 기어’를 40% 축소하여 30년 만에 복각한 게임기어 미크로는 액정 사이즈도 작고 내부에 다양한 게임을 담지 않아 본격적인 판매용 라인업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많지만, 세가가 아직 충분한 하드웨어 제작 역량을 지녔으며 해당 분야의 끈을 놓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기종으로 평가할 수 있다. 앞으로 과거의 실패를 거울삼아 향상된 스펙과 다양한 킬러 타이틀, 그리고 유려한 디자인으로 무장한 세가만의 본격 하드웨어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