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의 초창기 반도체 개발사
오늘날 한국은 명실상부한 IT 강국으로 인정받고 있다. 삼성·LG전자를 비롯한 전자 기업들이 영원할 것 같던 아성을 일본 기업의 아성을 무너뜨렸으며 인터넷도 웬만한 곳에서는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원래부터 그런 구도가 형성된 것은 아니다. 이 분야의 대표적인 회사으로 꼽히는 삼성전자의 본격적인 반도체 개발사는 불과 40여 년 전 시작됐다.
삼성 측이 고부가가치 산업을 추구해야 한다는 방침에 따라 반도체 시장 진출 계획을 공개적으로 밝힌 것은 1983년 초였다. 83년 2월 호암 이병철 회장이 도쿄에서 뜻을 굳혔고, 한 달 후 신문지면에 ‘오늘을 기해 초고밀도집적회로(VLSI) 사업에 투자하겠다’는 선언문이 실림으로써 모두가 그 뜻을 알게 됐다.
시장의 반응은 부정적인 의견 일색이었다. 라이벌 업체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우려하는 여론이 주류였다. 주된 이유는 빈약한 한국의 산업 기반과 반도체 제작 공정의 어려움이었다. 낮은 수준의 칩만 생산하던 입장에서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었지만 호암은 1년여에 걸친 기초 조사와 연구 검토 끝에 계획을 밀어붙이기로 했다.
삼성은 이미 1974년 이상규·강기동이 설립한 한국 최초의 전(前) 공정 반도체 제조사인 한국반도체를 인수하여 가전제품이나 시계에 들어가는 칩을 생산하면서 기술력을 다지고 있었다. 해외 유수의 제조사를 둘러보면서 앞으로 반도체가 전자 산업의 핵심이 되리라 판단한 호암이 이를 고도화시키기로 한 것이다. 이외에도 금성사 계열의 금성전자를 비롯해 반도체에 손댄 업체가 몇 군데 있었지만 1973년 석유파동의 직격탄을 맞고 다들 지리멸렬하게 있는 형편이었다. 당시까지의 수준은 종합하면 외국 기업들의 하청 생산기지 정도에 가까웠다.
반도체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삼성이 전략 개발 상품으로 선정한 것은 메모리 반도체, 그중에서 가장 수요가 많고 경쟁사도 많은 D램이었다. 삼성은 출혈 경쟁과 공급 과잉을 감안하더라도 시장 규모가 가장 큰 D램에 먼저 진입하기로 했다. 야심차게 시작은 했지만 개발진 누구도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스타트를 끊었다. 삼성반도체통신은 미국 마이크론, 일본 샤프와 기술계약을 체결하고 64K(킬로바이트) D램의 개발에 들어갔다. 개발진은 마이크론에서 제공받은 64K D램을 완전히 분해한 후 회로도를 그렸다.
기술 이전을 해준 해외 업체들은 계약을 이행하면서도 삼성이 기민하게 움직이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술에 대한 갈증과 자체 개발의 열망에 불타는 삼성 개발진의 행보는 생각보다 훨씬 빨랐다. 83년 5월 프로젝트에 본격적으로 착수한 지 6개월 만인 11월 64K D램의 생산, 조립, 검사를 독자 기술로 성공시킴으로써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계 3번째 VLSI 생산국이라는 타이틀을 얻어 냈다. 기술 선진국 대비 10년 이상 뒤처진 격차를 대폭 좁힌 쾌거였다. 12월 1일 있었던 성공 발표는 국내외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그야말로 고도성장기의 무용담이라 할 만하다.
이어 1984년에는 용량을 대폭 늘린 256K D램 개발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앞선 64K는 설계를 마이크론에 대부분 의존했지만 256K D램은 설계부터 생산까지 독자적으로 수행한 진정한 국산 D램이라 할 수 있다. 영국 리카르도와 협력한 알파 엔진과 설계까지 독자적으로 한 베타 엔진(현대자동차)의 관계와도 비슷하다. 뼈를 깎는 기술자들의 노력 끝에 86년에는 1M(메가바이트), 87년에는 4M D램 개발까지 완수했다. 삼성이 치고 나가자 이에 자극받은 금성사와 현대도 반도체에 주목했다. 삼성의 라이벌이라 불리는 현대는 정주영 회장의 강력한 의지를 등에 업고 현대전자를 설립하여 전자 산업에서도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다.
삼성의 전진은 80년대 중반 찾아온 반도체 시장 불황을 넘어 계속됐고, 불황을 무릅쓴 집중투자는 1992년 또 다른 결실을 맺었다. 세계 어느 기업도 해내지 못한 64M D램 개발을 삼성이 최초로 성공시킨 것이다. 처음 시장 진출을 선언하여 비웃음을 산 지 10년 만에 일본 기업과의 격차를 줄이는 데 그치지 않고 앞서 나가는 순간이었다. 같은 해 시장점유율도 13.5%를 차지하여 일본 도시바를 제치고 세계 1위에 올랐다.
삼성전자가 개발한 64K D램은 2013년 한국 근대산업사에 기여한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