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장매체 변천사(2): 원형 속의 선율, LP의 흥망성쇠
요즘 LP의 인기가 다시 높아지고 있다. 직경 30cm에 달하는 커다란 디스크 위에 아날로그로 소릿골을 파서 제작하는 LP는 ‘긴 재생시간‘(Long Playing)의 약자다. 재생은 가늘게 파인 홈을 따라 움직이는 바늘이 담당한다. 비닐계 재질로 만들어지는 LP는 시중에서 볼 수 있는 비닐봉지와 구분하기 위해 바이닐(Vinyl)이라고 따로 칭한다. 엄밀히 말하면 바이닐 안에 크기만 다르고 재질이 같은 SP, EP 등이 포함되지만 LP가 대명사가 된 요즘에는 바이닐 하면 거의 LP로 통한다.
1948년 미국 컬럼비아 레코드사가 발표한 LP는 기존 SP가 갖는 짧은 재생시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개발되었다. 1948년 4월 컬럼비아 레코드의 사장 테드 월러스타인이 직접 선보인 LP는 재생 시간 30분에 달하는 곡을 한 음반에 담을 수 있었다. 초창기 LP는 라이벌 RCA가 선보인 규격인 EP와 경쟁했다. 그러나 음악 발매의 대세가 싱글 대신 앨범으로 바뀌며 LP의 승리가 확정됐다.
돈 없는 사람들은 제작 경로가 불분명한 불법복제판을 샀다. 내구성과 음질은 떨어졌지만 가격이 엄청나게 저렴했다. 저작권 인식이 희박하던 시절, 불법복제판은 소위 ‘해적판‘, ‘빽판’이라 불리며 국내에서도 암암리에 유행했다. 영원할 것 같았던 LP는 카세트테이프의 공세에도 버텼지만 훨씬 작고 편리한 CD가 대중화되면서 1990년대 결국 자취를 감추었다. 재고가 된 막대한 LP판들은 폐기처분이란 운명을 맞았다.
그런데 2020년 상반기 미국에서는 LP가 CD보다 많이 팔렸다. 1986년 이후 34년 만의 판매량 역전이다. 2023년 상반기에도 전년 대비 판매량은 20% 이상 상승했다. 국내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음반 판매 사이트 예스24에 따르면 2020년 LP 판매량이 전년 대비 73%나 증가했다고 한다. 오프라인 레코드점에도 LP를 찾는 마니아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기술 발전으로 인해 시대의 뒤안길로 영영 사라질 것처럼 보였던 LP가 다시 뜨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제 음악을 듣기 위한 전용 플레이어가 아예 필요 없는 편리한 세상이 되었지만, 현대인은 물성이 없는 디지털 세상에서 오히려 공허함을 느낀다. 그러나 역사성과 상징성을 지닌 LP라는 물건은 그 음악을 소유하고 있다는 안정감과 함께 다양한 자켓 디자인과 수집욕까지 만족시켜 준다. LP를 사면 이를 재생할 수 있는 턴테이블과 관련 용품에도 자연스럽게 눈길이 간다. 그리고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끼리 모여든다. 하나의 취미가 되기 위한 조건이 충족된 셈이다. 재생 그 자체보다 소장 목적이 중요해진 만큼 턴테이블이 없어도 LP를 구매하는 사람들도 많다. LP 리부트 바람에 맞춰 턴테이블 시장도 활성화되고 있다. 최근 출시된 휴대용 LP 플레이어 오디오테크니카 AT-SB727 포터블 블루투스는 턴테이블이 차지하는 넓은 면적 문제를 해결한 제품이다.
LP를 제작하거나 판매하는 곳도 부활하고 있다. 최성철 대표가 설립한 제작소화수분이 대표적이다. 최성철 대표는 성음(폴리그램)에 재직하던 1997년 LP를 폐기하는 장면을 직접 지켜본 역사의 증인이다. 이후 다른 직업을 전전하던 그는 가장 잘 아는 것으로 승부를 보기로 결정하고 음반 업계로 돌아왔다. LP 바람을 타고 2023년 1월 동생과 함께 제작소화수분을 차렸다. 제작소화수분은 마스터링-커팅-스탬퍼 제작-프레스-후가공을 거쳐 국내에서 LP를 직접 제작・발매하는 흔치 않은 곳이다.
서울 회현동의 회현지하상가나 마포구 동교동 김밥레코즈는 LP 앨범을 취급하는 곳으로 마니아들 사이에 소문난 곳. 종로 세운상가 근처에 위치한 서울레코드에서도 다양한 LP 앨범을 만날 수 있다. 신보 발매 시 아예 LP를 포함하는 가수도 늘고 있다. 2014년 나온 아이유의 〈꽃갈피〉는 비록 리메이크 앨범이지만 LP 붐을 일으킨 대표적 작품이라 할 만하다.
이외에도 이문세, 이상은, 이적, CL, 블랙핑크 로제, 지수 등 세대 구분이 의미 없을 만큼 다양한 가수들이 LP 앨범을 냈거나 발매 계획을 갖고 있다. 디스크에 색을 넣어 비주얼을 강화한 컬러 LP는 수집의 또 다른 묘미다. 반투명한 색색깔의 컬러 디스크가 돌아가는 장면을 보고 있으면 이것이 LP판 수집의 이유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래픽 디자인 측면에서도 거대한 자켓으로 큰 아트보드를 제공하는 LP는 크기 자체가 작은 CD나 디지털 음원에 비해 디자이너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우리 생활에서 쓰이다 사라져 간 많은 아날로그 매체 중 LP가 특히 주목받는 이유가 있다면, 기왕 아날로그를 지향할 바에는 보다 확실한 것을 찾겠다는 심리가 아닐까? 이는 필름사진 마니아들이 자동카메라보다 수동카메라, 타자기 수집가들이 전자식 타자기보다 수동 타자기를 찾는 것과 비슷한 면이 있다. 인간은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근본을 떠나 생활하기는 어려운 존재인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