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역사를 지닌 애플 II의 파생 모델

오랜 역사를 지닌 애플 II의 파생 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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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6월 데뷔한 애플의 제대로 된 첫 번째 개인용 컴퓨터 애플 II(애플 I는 메인보드 상태로 판매됐다)는 초기 PC 붐을 타고 폭발적으로 팔려 나가며 신생 벤처기업 애플 그리고 20대에 불과했던 두 창업주,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의 입지를 공고히 해준 기념비적 모델이다.

사실 전용 프로그램이 적었던 초창기엔 판매량이 많지 않았다. 그러나 1979년 애플 II를 위한 최초의 스프레드시트 프로그램인 VisicalC가 선보이면서 PC가 가진 잠재력에 눈을 뜬 많은 사람들이 애플 II를 구매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막 쏟아지기 시작한 각종 게임 타이틀도 판매에 일조했다. 비슷한 시기 한국에서도 세운상가를 중심으로 불법 복제품을 포함한 호환 기종이 다수 판매됐으며, 2023년 현재 레트로 컴퓨팅을 즐기는 소수의 매니아들이 인터넷 카페를 중심으로 노하우와 관련 프로그램을 공유하며 활동하고 있다.

애플 II는 원래 후속모델인 애플 III(1980)로 이어지면서 단종될 계획이었다. 그러나 애플 III와 리사가 계속 실패하면서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계속 생산됐다. 1993년 말까지 생산되며 8비트 컴퓨터로는 이례적으로 15년이라는 오랜 세월 장수했기에 기간에 걸맞는 다양한 파생 모델이 니왔다. 크고 작은 파생 모델 중 의미 있는 주요 기종을 꼽아 보았다.

플로피 디스크를 인식할 수 있는 주변장치인 디스크 II를 갖춘 애플 II세트. / wikipedia

애플 II(1977): 스티브 워즈니악이 당시까지의 상용 부품으로 설계한 시리즈의 첫 모델이다. CPU는 MOS 테크놀로지의 6502를 사용했고 저장 매체로 카세트테이프를 썼지만 곧 5.25인치 플로피디스크로 변경됐다. 본체에 붙은 로고타입 속 숫자 2가 '] [' 형태로 디자인되어, 매니아 중에는 이 기종을 apple][로 적는 사람도 있다. 저장장치를 제외하고도 1,298달러에 달하는 가격은 경쟁 모델에 비해 비쌌지만 뛰어난 사용자 편의성과 안정성으로 시장을 장악했다.

키보드에는 ‘REPT’라는 특이한 키가 있는데, 동일 키를 반복 입력하게 해 주는 기능키다. 이후 모델은 키를 일정 시간 누르고 있으면 자동 반복 입력이 가능하도록 개선되어 이 키가 빠지게 된다. 표준 배열이 따로 없었던 당시엔 제조사마다 다른 키보드 배치가 다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애플 IIe(1983): 애플 II를 대체하기 위해 개발된 신제품이 잇따라 실패하고 II의 인기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자, 애플은 다시 II에 관심을 두고 개선 작업에 착수한 끝에 IIe를 내놓았다. 모델명 뒤에 붙은 e는 개량을 뜻하는 ‘Enhanced’의 약자다. 외형은 크게 바뀌지 않았지만 내부 부품의 개수를 줄이고 ROM을 비롯한 소소한 스펙을 개선했다. 단종 시까지 10년간 판매되어 시리즈 중 가장 오랫동안 시판됐다.

애플 IIc(1984): 애플 II의 역사에서 GS와 더불어 가장 독특한 모델이다. C는 Compact의 약자이며, 산업디자인 전문회사 프로그디자인이 애플 제품을 위해 제안한 ‘스노우 화이트’ 디자인 언어가 적용된 첫 제품이다. 휴대용을 뜻하는 이름에 걸맞게 본체에 손잡이가 달려 있고, 몇몇 포트가 삭제되어 확장성은 적지만 특유의 오밀조밀한 디자인이 좋은 평가를 받는다. 실제 사용하지 않아도 디스플레이용으로도 손색없다.

애플 IIGS(1986): IIc와 마찬가지로 스노우 화이트 룩으로 만들어진 깔끔한 직선 케이스가 특징인 IIGS는 원래 시리즈보다 매킨토시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다. 그래픽 성능과 사운드를 개선한 모델답게 모니터도 원래 II의 모니터가 아닌 컬러 모니터를 쓴다. 기기 자체의 성능은 나쁘지 않았지만, 상위 기종인 매킨토시의 존재와 함께 8비트 컴퓨터가 슬슬 현역에서 내려오던 때라 여러모로 애매한 포지션의 기종이었다. 본체와 디자인을 맞춘 키보드는 키감으로 좋은 평가를 받으며 지금도 가끔 중고 거래가 이뤄지고 있다. 스티브 워즈니악의 사인이 본체 전면에 프린팅된 Woz 리미티드 에디션이 있다.

애플 IIe 카드(1991): 매킨토시에 장착하여 애플 II용 소프트웨어를 실행시킬 수 있게 해주는 장치다. 메인보드를 닮은 작은 카드에 IIe의 전체 기능을 넣은 이 제품은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모두 교체할 여력이 없는 애플 사용자가 더 적은 투자로 매킨토시와 애플 II 양쪽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요즘 같으면 소프트웨어 에뮬레이팅으로 가능하겠지만 이 시기만 해도 하드웨어 보강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1995년 5월까지 판매되어 본 제품보다 장수했다.

1993년 11월 애플 카탈로그에서 IIe가 삭제되면서 8비트 컴퓨터의 전성기를 대표했던 애플 II의 긴 역사는 막을 내렸다. 1990년대 초반은 공고해진 윈·텔(MS-인텔) 연합에 밀려 패배가 확실해진 애플이 어려움을 겪던 시기였다. 기왕 오래 생산한 김에 단종시키지 않고 프로그래밍을 위한 염가의 교육용으로 라인업에 계속 남겼더라면 어떨지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