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열전(3): 한국의 IT 선구자들 - 이용태
1980년대 초는 IBM PC의 데뷔와 애플 III, 매킨토시 128K 등 향후 시장을 좌우할 쟁쟁한 모델들이 쏟아지는 개인용 컴퓨터의 세계적인 여명기였다. 이런 흐름은 미약하나마 한국에서도 일어났다. 비록 본산지인 미국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PC를 만들어 보급하려는 선구자들이 있었다. 삼보컴퓨터 창업주 이용태 박사는 그 중 대표적인 인물로 꼽힌다.
서울대학교 문리대 졸업 후 미국 유타대학교에서 통계물리학을 전공한 행파 이용태 박사는 유학길에 만난 PC를 보고 그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TV조차 드물던 한국의 환경에서 PC가 무엇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국산 PC 개발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는 결국 직접 회사를 차려 이상을 실현하기로 결심하고 1980년 청계천 세운상가의 한 창고에서 자본금 1,000만 원을 들고 삼보엔지니어링을 창업했다. 기술 기업에 대한 연구비 지원 등의 정책적 지원이 전무했던 척박한 환경 속에 설립된 삼보엔지니어링은 오늘날 국내 벤처기업 1호로 평가받는다. 요즘으로 치면 IT 계열 스타트업이라고 할 수 있다. 사명인 삼보(三寶)는 인재ㆍ기술ㆍ서비스라는 사업의 세 가지 보물을 의미하는데, 이를 반영하듯 영문명은 음을 그대로 읽은 ‘Sambo’ 대신 트라이젬(Trigem)을 썼다.
회사 설립 이듬해인 1981년 삼보에서 내놓은 SE-8001은 최초의 국산 PC 고유모델로 꼽힌다. 사양은 여러모로 여타 기종에 미치지 못했지만 당시 해외 기술에 의존하던 PC를 자체 개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캐나다에 1,200대 수출 실적도 기록했다. 1년 뒤에는 애플 2의 호환 기종인 Trigem20을 개발, 성공적으로 출시하며 시장의 총아로 떠올랐다. 이후 컴퓨터 전문 생산 공장 건설(1983), 컴퓨터 전문 기술 연구소 설립(1984)으로 차근차근 기반을 다져 나갔다. 이런 투자를 바탕으로 1985년에는 국내 최초의 IBM PC 호환 기종인 트라이젬 286을 내놓는 등 순항했다. 이후 금성사, 삼성전자, 대우전자 등의 대기업에서도 PC 제조에 뛰어들며 국내 PC 산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용태 박사의 업적으로는 통신망 보급도 빼놓을 수 없다. 체신부는 1982년 전화 관련 업무와 별도로 데이터통신을 전담하는 회사를 설립하기로 결정한 후 이용태 박사를 초대 사장으로 선임했다. 고심하던 데이콤 설립 주체가 한국전자기술연구소 부소장을 역임한 후 삼보컴퓨터로 업계에서 한창 주가를 올리던 이 박사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지금은 익숙한 ‘정보통신’이란 용어도 이 시기 탄생했다. 이용태 박사가 1982년부터 6년간 재임하며 기반을 닦은 한국데이타통신은 1986년 한국 최초의 PC통신 서비스 ‘천리안’을 선보이고 1991년 국제전화사업에 뛰어드는 등 1990년대 초중반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신생 분야가 주는 첨단 이미지와 함께 업계 연봉이 상위권이었던 것도 인재 확보에 한 몫을 했다.
1996년 통신사업 진출을 추진하던 한국전력공사가 택한 파트너도 삼보컴퓨터였다. 한전과 삼보가 공동 출자하여 설립한 두루넷(thrunet)은 1998년 국내 최초로 초고속인터넷 서비스를 시작하며 오늘날 한국이 인터넷 강국으로 성장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언제 어디서나 두루두루 통하는 서비스를 하겠다는 의미를 담은 ‘두루넷’을 필두로 하나로통신, KT, 파워콤이 차례로 뛰어들면서 초고속인터넷 춘추전국시대가 열렸다. 두루넷은 1999년 한국 기업 최초로 미국 나스닥에 직상장한 기업이라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전성기가 있으면 시련도 있는 법이다. 한때 국내 PC의 대명사로 통했던 삼보컴퓨터는 90년대 들어 라이벌의 거센 도전에 직면했다. 1994년 데뷔한 삼성 매직스테이션의 인기도 삼보의 좌절을 부추겼다. 대기업과의 체급 차이와 투자비에서 오는 격차를 극복하지 못한 삼보는 이후 생존을 위해 저가 제품 위주로 라인업을 바꾸면서도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야구선수 박찬호를 모델로 기용한 드림시스61(1997)을 출시하여 시장에 다시 한번 삼보 바람을 일으키기도 했다.
위기 극복을 위한 사업 다각화가 경제불황의 파고에 부딪히면서 2005년 법정관리를 신청하는 등 부침을 이어온 ‘삼보’에 대한 여러 평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삼보컴퓨터는 우리 IT 역사가 계속되는 한 영원히 회자될 이름이라는 사실이다. 그 맨 앞줄에 이용태라는 세 글자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