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열전(2): 한국의 IT 선구자들 - 전길남
오늘날 인터넷의 발명은 컴퓨터의 발명에 비견될 정도로 우리 삶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현대인은 SNS부터 사내 전산망까지 모두 인터넷의 혜택을 입고 있다. 인터넷이 사라진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현대 사회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이 인터넷 통신 강국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오래전 일이다. 그러나 속도와 인프라는 인정해도, 한국이 미국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인터넷 연결을 성공시킨 국가라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많다. 선진기술이라면 앞순위는 모두 구미 선진국에서 차지하고 있겠거니 막연히 생각하는 이가 적지 않다. 그러나 한국의 인터넷 역사는 생각보다 까마득한 1982년 시작됐다. 여기에는 전길남 박사를 중심으로 한 연구팀의 공이 컸다.
‘전길남’. 40년이 넘은 지금도 일반인에게 여전히 생소한 이름이다.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박사를 마치고 NASA 컴퓨터 시스템을 설계하는 연구원으로 일하던 전길남 박사의 커리어에 터닝 포인트가 생긴 것은 36세 때인 1979년. 한국 정부가 추진한 해외 주재 우수 과학자 귀국 사업에 응하면서부터였다. 외화를 위해 오직 수출을 외치던 시절, 귀국한 그에게 정부가 처음 맡긴 업무는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수출용 컴퓨터 개발이었다. 그러나 인력, 자금, 시설이 모두 부족한 국내 상황을 파악한 전길남 박사는 컴퓨터 하드웨어 개발보다 네트워크 구축이 더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컴퓨터의 본고장 미국에서도 이제 막 애플 2가 인기를 얻으며 자리를 잡아 가던 시기, 일반인들에겐 텔레비전(TV)도 아직 귀한 문물이었다. 인터넷은 고사하고 개인용 컴퓨터(PC)가 뭔지도 모르는 이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정부의 관심 외 업무에 체계적인 지원이 따를 리 없었다. 전 박사가 제출한 첫 컴퓨터 네트워크 개발 제안서는 반려됐다. 그는 하드웨어 개발과 네트워크 연구를 병행해야 했다. 그가 개발한 컴퓨터는 이후 최초의 국산 16비트 PC인 SSM-16으로 실현된다.
1982년 5월 경북 구미의 전자기술연구소(KIET, 현 ETRI). 컴퓨터개발실의 한 모니터에 연구원들의 시선이 쏠려 있었다. 잠시 후 모니터에 ’SNU’이라는 문자열이 천천히 떴다. 놀랍게도 이것은 로컬 컴퓨터에서 출력한 것이 아니라 250km 이상 떨어진 서울대학교에서 보낸 메시지였다. 전길남 연구팀이 아시아 최초이자 세계 두 번째로 두 장소를 잇는 인터넷 프로토콜 통신 네트워킹 구축에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미국이 보안을 이유로 해외 인터넷망 접속에 꼭 필요한 장비인 라우터 판매를 승인하지 않자 이 또한 독자 기술로 성공시켰다.
이후 KAIST 전산학과 교수로 자리를 옮긴 그는 KAIST에 SDN(Software Development Network) 운영센터를 설치하고 네트워크를 계속 확장했다. 1985년 무렵 SDN에는 국내 주요 대학 정보통신 관련 학과와 기업 등 20여 개 단체가 접속해 있었다고 한다. 이런 네트워크망 구축을 통해 한국의 초기 인터넷 통신이 시작될 수 있었다. 이때만 해도 연구자들 사이 학술 교류 채널 성격이 짙었던 인터넷은 점점 대중화되며 현대인의 생활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1990년대 중후반 거세게 불었던 PC통신 열풍이 그것을 증명한다. 두 주인공이 스토리가 진행되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만나지 않고 PC통신으로 대화하는 신개념 로맨스로 인기를 끈 영화 〈접속〉(1997)을 보면 유니텔, 천리안, 나우누리와 함께 당대 인기 PC통신 프로그램이었던 하이텔의 사용자 인터페이스가 잘 드러나 있다. 시간과 공간은 다르지만 이는 모두 초창기 인터넷 연구팀의 유산이다.
전길남 박사는 KAIST에서 2008년까지 전산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시스템구조연구실(SA랩)에서 허진호, 김정주, 송재경, 정철, 나성균, 박현제 등의 업계 거목을 손수 키워냈다. 업계 선구자였던 그의 연구실은 교수나 연구원 같은 안전한 진로보다 벤처기업 등 도전을 택하려는 학생에게 좋은 환경이었다고 전해진다.
전길남 교수는 인터넷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2년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인터넷 분야 최대 국제기구인 인터넷 소사이어티(ISOC)가 선정한 세계 인터넷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같은 해 대한민국 인터넷 30주년 기념식에서 공로상도 받았다. 그는 한국 통신 역사에 지워지지 않을 족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가 일군 어떤 업적이나 상보다도 값진 것은 그가 지닌 현역 전문가로서의 영원한 개척 정신일 것이다. 그의 일대기는 2022년 〈전길남, 연결의 탄생〉(김영사)이라는 책으로도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