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열전: 반도체 설계의 전설, 짐 켈러와 텐스토렌트

인물 열전: 반도체 설계의 전설, 짐 켈러와 텐스토렌트
사진 / 텐스토렌트

마이크로프로세서 엔지니어인 짐 켈러 텐스토렌트 최고경영자(CEO)가 지난 2월 말 방한했다. 연초 ‘챗GPT의 아버지’로 통하는 샘 올트먼 오픈AI CEO의 방한에 이어 빅테크계 거물들이 잇따라 한국을 찾은 셈이다. 반도체 설계의 전설로 불리는 짐 켈러(Jim Keller)는 텐스토렌트 한국지사의 설립을 앞두고 이뤄진 이번 방문을 통해 AI 반도체 부문에서 국내 기업과의 적극적인 협업 가능성을 모색했다.

1982년 지금은 휴렛팩커드에 인수된 디지털이큅먼트(DEC)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그는 인텔에서 수석부사장, AMD에서 수석설계자를 역임했고 AMD, 애플, 인텔, 테슬라 등의 여러 기업에서 설계 업무를 주도했다. 일찍이 AMD의 대표 중앙처리장치(CPU)인 K8을 설계했으며, 애플에서는 A4, A5 칩의 설계를 진두지휘하며 애플이 모바일 프로세서를 자체적으로 조달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았다.

그가 떠난 후 부진에 시달리던 AMD는 그를 다시 복귀시켰는데 복귀한 켈러는 지금까지도 AMD CPU의 근간이 되는 라이젠 시리즈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이어 테슬라에서는 자율주행용 반도체를 연구 개발했다. 2020년 인텔 퇴사를 끝으로 메이저 기업에서의 커리어를 일단 끝낸 그는 2021년 텐스토렌트에 최고기술책임자(CTO)로 합류했고 지난해 CEO로 올라서서 반도체 설계를 진두지휘하고 있다.

굵직한 설계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소화한 인물인 만큼, 짐 켈러의 퇴사와 새 회사 합류 소식은 그 자체로 업계에서 엄청난 화제가 되었다. 특히 새 회사가 스타트업이라는 점에서 놀라움은 더했다. 인텔이나 애플에 비하면 국내에선 아직 생소한 기업일 텐스토렌트(Tenstorrent)는 캐나다 토론토에 본사를 둔 AI 반도체 관련 스타트업이다. 동종업계 대비 규모는 크지 않지만 시장가치는 10억 달러 이상으로 평가받는 유망한 기업으로 꼽힌다. 구체적으로는 기계 학습용 프로세서와 리스크 파이브(RISC-V) 기반의 반도체를 주로 만든다. RISC-V는 반도체 생산 및 개발에 대한 권리가 개방된 오픈소스이기 때문에 이를 활용해서 인공지능 산업에 쓰이는 반도체를 설계 및 제조하는 것이다. 텐스토렌트가 RISC-V 쪽으로 방향을 잡은 데는 집단지성의 힘을 중시하는 짐 켈러 CEO의 성향이 크게 작용했다.

그의 방한과 함께 텐스토렌트와 국내 기업 간의 관계도 새삼 주목받고 있다. 특히 켈러가 DEC에서 근무하던 1995년 처음 인연을 맺은 삼성전자가 주요 파트너로 꼽힌다. 텐스토렌트는 지난해 삼성전자가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건설 중인 4나노미터 파운드리 미세공정을 통해 자사의 AI 반도체 ‘퀘이사’를 2025년부터 위탁생산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켈러는 또 다른 유력 회사인 대만 TSMC 대신 삼성을 택한 이유에 대해 삼성전자가 패키징 디자인부터 백엔드, IP 제공에 이르기까지 일종의 풀 서비스 제공이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켈러는 삼성의 라이벌 격인 LG전자, 자동차가 주력 제품인 현대자동차그룹과도 차세대 제품에 필요한 반도체 개발을 위해 밀접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자동차에 들어가는 반도체의 역할 또한 무시할 수 없고 시장의 미래가 전기차 위주로 재편되면 전자기술이 더욱 중요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시대가 바뀌고 산업 간 경계가 스마트 바람을 필두로 점차 희미해지면서 분야를 가리지 않고 반도체 기술을 중심으로 협력이 이뤄지는 셈이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지난 시리즈에서 총 투자금액 1억 달러의 절반에 달하는 5천만 달러를 투자하며 텐스토렌트에 대한 기대를 보여줬다.

평생 마이크로프로세서 엔지니어로 살아온 짐 켈러는 큰 것 이전에 그 기초가 되는 작은 것을 중시한다. 그는 2월 말 연합인포맥스와의 인터뷰에서 “큰 회사는 작은 회사부터 시작한다"며 "(한국 정부는) 더욱 스타트업을 육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차적인 채용을 마친 텐스토렌트 한국지사는 현재 판교에 오피스를 마련, 업무에 들어갔다고 한다. 텐스토렌트는 현재 라이벌로 꼽히는 엔비디아, 오픈AI에 비해 작은 규모를 지녔으나 그 존재감은 결코 작지 않다. 엔비디아의 AI 반도체 독점 구도를 깨려는 켈러의 다음 행보가 우리의 산업과 생활을 어떤 곳으로 데려다 놓을지 기대해 봐도 좋을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