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 비즈니스 노트북의 탄생: 씽크패드 700C

본격 비즈니스 노트북의 탄생: 씽크패드 700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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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얼리어답터의 장난감 혹은 게임기에 가까웠던 개인용 컴퓨터의 보급을 촉진한 것은 사무 현장이다. 1979년 출시된 스프레드시트 비지캘크(VisiCalc)는 애플 II의 기록적인 판매량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에 고무된 애플은 비록 실패했지만 후속 모델 애플 III을 전문가용 비즈니스 PC로 포지셔닝하기도 했다. 1981년 애플의 맞수 IBM이 내놓은 IBM PC(5150) 역시 가정용보다는 사무용에 가깝게 태어났다.

그러나 애플과 IBM은 이와 별개로 1980년대 중반 이후 세계 PC 시장을 이끌어가는 역할에서 점점 밀려나고 있었다. 애플은 시장을 선도하기는커녕 애플 III과 리사의 잇따른 실패로 코너에 몰렸다. 기념비적인 매킨토시 128K도 애플을 이전의 지배적 위치로 복귀시키지는 못했다. IBM의 경우는 더욱 아이러니했다. 공개 아키텍처가 촉발한 호환기종의 범람은 PC 보급에 공헌했지만 정작 주인공 IBM의 점유율이 추락하는 상황을 낳은 것이다.

IBM의 원래 전략은 PC 보급률을 높이면서도 프리미엄 브랜드로 일정 점유율을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었을지 모르나, 컴팩 등의 라이벌이 생산한 호환기종과 IBM PC의 차별점이 사라지면서 소비자들은 더욱 가격 대 성능비가 높고 저렴한 제품을 찾아 떠나갔다. 뭔가 잘못됐음을 깨달은 IBM은 80년대 후반 뒤늦게 폐쇄 아키텍처를 표방한 PS/2 규격을 시도했으나 자사가 만든 PC/AT 규격에 밀려 처절히 실패했다. 그러나 데스크톱 시장에서 밀려난 IBM은 랩톱(노트북) 시장에서 또 하나의 이정표를 세우며 노트북 분야의 발전에도 공헌했다. 1992년 빛을 본 씽크패드(ThinkPad) 시리즈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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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성과 실용성을 양립시킬 수 있는 노트북 기술이 점점 무르익어 가던 1992년 일본 IBM의 야마토연구소가 개발한 씽크패드의 첫 모델 700C는 본격적인 비즈니스용 노트북을 표방했다. 씽크패드라는 이름은 IBM 사내 슬로건인 ‘씽크(Think)’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산업디자이너 리차드 사퍼가 야마토연구소의 카즈 야마사키와 협업해 디자인한 씽크패드는 검은 본체에 마치 도시락통을 연상케 하는 각진 외형을 지녔다. 도시락통이 떠오르는 인상은 기분 탓이 아니다. 오리지널 씽크패드는 실제로 일본 전통 도시락(벤또)의 배치에서 영감을 얻어 각종 부품을 구획 별로 세밀하게 배치했다. 모델이 된 도시락은 지금도 야마토연구소에 보존 중이다. 지금은 애플 맥북이 가장 세련된 노트북으로 평가받지만 1992년 당시 그런 타이틀은 말끔한 씽크패드에 더욱 어울렸다.

씽크패드가 인기를 얻은 것은 디자인과 함께 성능과 안정성도 출중했기 때문이다. CPU로 인텔 486을 썼고 10.4인치 컬러 디스플레이와 120MB 용량의 하드디스크 드라이브를 포함한 평균 이상의 사양을 3kg가량의 본체에 담았다. 극한 환경에서 씽크패드를 테스트한 후 합격 판정을 내린 미국 항공우주국(NASA)은 1993년 허블 우주망원경 수리를 위해 우주왕복선 엔데버에 씽크패드를 실어 우주 공간으로 날려 보냈다. 씽크패드는 수십 년간 우주 공간에서, 사무실에서, 혹은 교통수단에 몸을 실은 비즈니스맨의 무릎 위에서 변함없이 활약했다.

현재까지 유지되는 씽크패드 키보드의 특징은 가운데 박힌 작은 트랙포인트다. 키보드 G, H, B키 사이에 위치한 빨간 원형의 조작부를 말한다. 블랙 일색인 본체에서 단연 눈에 띄어 일명 ‘빨콩’이라 불리기도 하는 트랙포인트는 검지 손가락만 약간 움직이면 마우스 커서를 움직일 수 있게 해준다. 그 조작성에 대해서는 사용자마다 호불호가 갈리지만 씽크패드 하면 첫손 꼽힐 아이콘임에는 분명하다.

씽크패드의 세계적 히트에도 불구하고 PC 사업에서 계속 부진했던 IBM은 2005년 PC 사업부 전체를 레노버에 넘겼다. 씽크패드를 둘러싼 모든 권리도 함께 넘어갔다. 그러나 레노버 씽크패드는 근본적인 콘셉트 변화 없이 시대에 따라 일부만 개선되어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씽크패드가 지닌 특유의 감성을 사랑하는 매니아 입장에서는 이보다 다행일 수 없는 일이다. 이제 일반인의 뇌리에서 IBM과 PC의 연관성은 거의 지워졌다. 그러나 그 유산은 건재하다. 씽크패드가 2014년 누적 판매량 1억 대를 돌파하며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단일 노트북 브랜드라는 기록을 세운 것이 대표적 예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