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식 키보드 이야기: IBM Model M
컴퓨터를 사용하려면 입력 장치가 필요하다. 각종 명령을 입력하는 용도로 마우스의 등장 훨씬 전부터 활약해 온 입력장치 키보드는 PC 사용에 빠질 수 없는 존재다. 애플 II나 코모도어 64 그리고 MSX 계열 기기에서 보이듯, 초창기 PC 키보드는 본체와 일체형인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데스크톱 본체, 모니터, 키보드는 PC 산업이 발전함에 따라 점점 분리형으로 진화했다. IBM이 내놓은 기계식 키보드 Model M은 1980년대 등장하여 오늘날까지 단단한 마니아층을 형성하고 있는 모델이다.
Model M의 등장은 198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1년 출시된 최초의 IBM PC 5150의 구성품 중 하나가 Model F로 이름 붙여진 키보드다. Model F는 5열 83키로 구성된 Model F는 Model M과 전체적인 디자인이 비슷하지만 키 숫자와 디테일이 달랐다. 당시만 해도 PC 키보드의 키 배치는 제조사 별로 들쭉날쭉했다. 오늘날 기준으로는 생소한 키도 많았다. 80년대 중반 이런 Model F의 키 배치를 6열 101키 체제로 바꾸고 약간의 디자인 변경과 원가절감을 거쳐 만들어진 후속 키보드가 Model M이다. 이후 IBM 호환기종의 키보드 배치는 거의 101키로 정착됐다.
Model M은 요즘 나오는 멤브레인 키보드보다 크고 무겁다. 크고 튼튼한 하우징은 호신용 무기로 쓸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멤브레인 키보드에 익숙한 사용자가 이 키보드를 처음 만져보면 커다란 타이핑 소리에 놀랄 수도 있다. 기관총을 쏘는 듯한 특징적인 타건감과 소리는 버클링(Buckling)이라 불리는 독특한 스위치 구조에서 온다. 내부에 굴절되는 스프링을 넣어 일정 압력을 넘어서면 스프링이 꺾이면서 접촉, 소리를 낸다.
이런 큰 소리를 개성적인 음색으로 볼지 소음으로 볼지는 사용자 취향에 따라 다를 것이다. Model M이 개발되던 시기의 PC 키보드는 전반적으로 시끄러웠다. 심지어 타이핑 소리가 PC용 키보드와는 차원이 다른 기계식 타자기와 전자식 타자기까지 현역이던 시절이라 Model M의 타이핑 소리가 특별히 크다고 평가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비교적 조용한 키보드가 대세인 현대의 사무실에서 쓰기 적절한 모델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원가절감이 없던 시대에 만들어진 Model M은 지금도 연결 단자만 맞게 끼우면 어디서나 현역으로 바로 사용 가능할 정도로 튼튼하다. 황변 현상이 거의 없는 단단한 하우징과 엄청난 스위치 내구성은 사용자의 수명보다 키보드 수명이 더 길 수도 있겠다고 생각될 정도다. Model M이 알려지면서 한국 내 중고거래도 점점 느는 추세인데 상태가 좋지 않은 제품을 찾아보기 힘들다. 키캡도 이중 키캡을 써서 차별화했다. 물론 그만큼 신경 써야 할 부품이 늘어난다는 단점은 있지만, 원가절감으로 인한 품질 저하가 거의 없던 업계 초창기의 낭만(?)을 느끼기엔 이만한 키보드가 없다.
PC용 키보드가 산업의 고도화와 출혈경쟁에 따른 영향으로 적당히 연약해지면서 전통적인 기계식 키보드의 설 자리는 점점 사라져 갔다. 기계식 키보드가 마니아층을 형성하고는 있으나 시장에서 압도적인 판매량을 차지하는 주류는 여전히 저가의 멤브레인 키보드다. 그런데 애플 IIGS 키보드, 확장 키보드 등 동시기 활약했던 라이벌과 달리 Model M은 단종되지 않았다. 이 키보드는 아직 완전한 미개봉 신품을 구매할 수 있다. Model M의 생산 설비는 80년대 이후 IBM의 하드웨어 제조 부문 자회사인 렉스마크(Lexmark)를 거쳐 권리 일체를 사들인 유니콤프(Unicomp)로 이전됐다.
현재 유니콤프는 Model M을 단종시키거나 개조하지 않고 오리지널에 가까운 신품을 제조・판매 중이다. 그러니 브랜드가 달라졌을 뿐 디자인과 기계적 구조는 오리지널과 거의 같다. 풀 배열과 함께 키보드 오른쪽 키패드를 삭제하여 공간활용성을 높인 스페이스 세이버(Space saver) 버전도 함께 나오고 있다. 키보드뿐 아니라 Model M과 함께 팔렸던 모니터나 마우스 등의 운명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다. Model M의 시작은 1980년대였다. 그러나 기계식 키보드를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때 그 시절 키보드를 추억하는 이가 존재하는 한 그 전성기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