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가 손바닥 위에 올라간다면? HP가 만든 팜톱 컴퓨터

PC가 손바닥 위에 올라간다면? HP가 만든 팜톱 컴퓨터

1946년 모습을 드러낸 에니악은 현대적인 컴퓨터의 효시로 꼽힌다. 대포의 탄도 계산과 풍동설계, 일기예보 등에 활용된 이 제품은 1만 9000개의 진공관과 25m의 길이, 30톤에 달하는 무게를 자랑했다. 이처럼 방 몇 개는 거뜬히 차지하는 거대한 메인프레임에서 시작한 컴퓨터는 기술 발전에 따라 데스크톱(Desktop)과 랩톱(Laptop)으로 점점 작게 진화해 왔다. 데스크톱은 책상 위에 올려놓고 쓸 수 있다는 의미, 랩톱은 무릎 위에서 쓸 수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더 나은 틈새시장을 찾는 사람들의 욕구는 그보다 더욱 작은 카테고리를 만들어 냈다. 손바닥 위의 사용을 목표로 하는 팜톱(Palmtop) 컴퓨터가 그것이다.

팜톱 컴퓨터는 넓게 보면 액정과 터치 펜만 있는 PDA도 포함되지만, 엄밀히 말하면 키보드를 달아 데스크톱이나 랩톱처럼 사용 가능한 제품을 말한다. 그중에서도 QWERTY 키보드와 숫자 키패드가 기본 탑재돼 있고 액정이 있는 상판과 키보드가 있는 하판을 접었다 펴면서 휴대 가능한 제품이 전형적인 '팜톱 컴퓨터'라고 할 수 있다. 한때 크게 유행했던 전자사전을 떠올리면 쉽다. 사이즈도 거의 같다.

최초의 팜톱으로 꼽히는 제품은 1991년 4월 HP가 출시한 95LX다. 공학용 계산기와 비슷한 외형에 운영체제(OS)로 MS-DOS를 얹은 95LX는 HP 개발진이 스프레드시트 프로그램인 로터스 1-2-3를 들고 다니면서 쓸 수 있는 방법을 찾던 중 구상됐다. 프로젝트명은 ‘재규어’(Jaguar). 1990년대 초만 해도 로터스 1-2-3이 사무 현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엄청났다. 이 프로그램과 관련 데이터를 주머니에 들어가는 사이즈로 휴대할 수 있다는 것은 혁신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개발 도중 로터스 1-2-3 외에 다른 프로그램도 구동이 가능하게끔 만들기로 하면서 프로젝트는 색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렇게 완성된 95LX는 512KB의 RAM에 AA배터리 2개를 전원으로 썼다. 전용 배터리 없이도 우수한 전력 관리를 통해 약 1개월에 달하는 작동 시간을 확보했다. 계산기, 메모장, 전화번호부, 파일 관리자 등의 어플리케이션을 기본 제공했고 통신 기능을 통해 이메일을 주고받을 수도 있었다. 비슷한 콘셉트의 포터블 기기가 거의 없었던 당시, 95LX는 많은 주목을 받으며 후속모델 100LX와 200LX로 이어졌다.

1994년 출시된 200LX는 HP 팜톱의 결정판이라 할 만하다. RAM은 조금 늘어난 2MB와 4MB, 전원은 전작과 동일하게 AA배터리 2개를 사용했다. AA는 어디서나 구하기 쉽다는 장점이 있다. OS는 MS-DOS 5.0을 탑재했다. 2MB의 램은 지금 기준으로는 턱없이 작은 용량이지만 KB 수준의 용량도 흔했던 초창기 PC 기준으로는 사이즈를 감안하면 무난한 수준이다.

단종된 지 오래지만 마니아들 사이에서 200LX의 인기는 아직도 식을 줄 모른다. 너무 무겁지 않은 MS-DOS 기반 프로그램의 구동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DOS용으로 제작된 간단한 게임도 즐길 수 있을 정도다. 오래된 200LX는 속칭 ‘식초현상’이라 불리는, 액정이 변형되는 문제가 있다. 이에 따라 액정 내부의 부품을 교체하는 자가 수리법이 널리 알려져 있다. 액정에 백라이트가 들어오도록 개조하는 사용자도 있다. 그 외에도 많은 팁이 200LX 관련 커뮤니티를 통해 꾸준히 공유된다. 여담으로 국내에 보급된 200LX 중에는 상판에 삼성생명이나 대한교육보험 로고가 찍힌 버전이 있다. 직업 특성상 외근이 잦은 보험설계사들에게 지급됐던 흔적이다.

필자는 팜톱 컴퓨터의 전성기를 90년대 중반까지로 본다. HP는 이후에도 300LX, 320LX 등의 개량형을 꾸준히 선보였으나 전작만한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지금도 ‘팜톱’이라 불릴 만한 소형 컴퓨터는 있지만 소수의 마니아의 전유물로 여겨진다. 메인 PC로 쓰기엔 작고, 이동하면서 쓰기엔 애매한 것이다. 그 밖에도 여러 이유가 있다. 200LX가 채택했던 MS-DOS는 텍스트 기반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GUI 기반 운영체제가 대세가 되면서 작은 액정은 가독성에서 불리해졌다. 마우스의 사용 빈도가 높은 GUI 운영체제 하에서는 휴대성이라는 팜톱의 장점이 희석된다. 하판에 마우스 대용 터치패드를 넣을 수 있는 랩톱과 달리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아이패드로 대표되는 태블릿 PC가 랩톱까지 위협할 만큼 발전했다. 외장 키보드를 장착한 아이패드 사용자가 기능상 굳이 팜톱까지 쓸 이유는 없다. 스마트폰의 등장 역시 팜톱의 수요를 대부분 잠식한 결정적 사건이었다.

팜톱 컴퓨터는 확고한 카테고리로 자리 잡지 못하고 과도기의 기기로 그쳤다. 그러나 대표주자인 HP의 팜톱이 제시했던 색다른 컴퓨팅 개념은 사라지지 않고 현재 통용되는 여러 제품 속에 녹아 있다. 어쩌면 미래에는 생각지도 못한 장점을 지닌 팜톱이 나타나 제2의 전성기를 이끌지도 모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