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3의 탄생과 발전

E3의 탄생과 발전

지난 기사에서는 세계 최대의 게임쇼라 불리던 E3(Electronic Entertainment Expo)의 폐지 소식과 함께 E3와 관련된 필자의 개인적인 소회를 정리해 보았다. 이번 기사에서는 E3가 어떤 상황에서 탄생했고 세계 최대의 게임쇼로 성장할 수 있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네 줄 요약

  • CES의 홀대와 부진을 틈타 1995년에 1회 E3가 개막
  • 플레이스테이션과 새턴의 경쟁 등 풍부한 게임계 이슈 덕분에 빠르게 안착
  • 최고 대목인 연말 시즌 판매 신장을 위해 약 6개월 전에 열리는 메가 쇼가 필요한 상황
  • 최대 시장인 미국에서 열리는 대규모 게임쇼라는 프리미엄도 한몫

E3의 탄생, 너무나 절묘했던 1995년

E3는 1995년 시작됐다. 그리고 시작부터 5만 명이 넘는 참석자가 몰리는 등 대성공을 거두며 선배격이자 1988년 시작된 유럽의 ECTS(European Computer Trade Show), 1년 늦은 1996년 시작된 도쿄게임쇼(Tokyo Game Show, TGS)와 함께 세계 3대 게임쇼로 평가받기에 이른다(ECTS는 2004년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으며 그 자리를 2009년 시작된 게임스컴이 이어받게 된다).
E3의 가장 큰 성공 요인은 개최 타이밍이 너무 절묘했다는 점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북미 지역에서 게임 산업은 국제전자제품박람회(The International Consumer Electronics Show, CES)를 통해 그동안 존재감을 어필해왔는데, 정작 박람회에서 게임 관련사는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다. 실내 전시장이 아닌 가설 천막 같은 곳에 부스를 배정하는가 하면, 관람객의 동선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등 홀대를 받았다.
그러던 중 CES에 큰 변화가 생겼다. 그동안 CES는 라스베이거스에서 1월에 겨울 행사(Winter CES)를, 그리고 시카고에서 6월에 여름 행사(Summer CES)를 열었는데 SCES의 인기가 줄어들며 1995년부터는 개최 도시를 올랜도, 필라델피아 등으로 바꾸는 변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며 1998년부터 CES는 겨울에만 열리게 된다. 여름에 대규모 전시회를 열 수 있는 판이 깔린 것이다.

사실 CES는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지금 같은 위상을 가진 못했다. 2010년대에 접어들며 가전제품에 ICT 기술이 접목되기 시작했는데, 주관하는 CTA(Consumer Technology Association, 소비자기술협회)가 여기에 빠르게 대응하면서 폭발적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리고 1995년은 여름 전시회라는 판 위에 내용물을 가득 채울 수 있는 이슈가 가득했던 시기다. 카트리지에서 CD로 매체를 바꾸며 등장한, 소위 ‘차세대 게임기’가 가장 치열하게 경쟁했던 시기이며, 소비자들의 관심이 가장 뜨거웠던 시기가 바로 1995년이다.
세가는 세가 세턴을 1994년 11월에 일본에서 판매하기 시작했고, 소니는 플레이스테이션을 1994년 12월에 일본에서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해가 바뀐 1995년, 두 회사는 장소를 옮겨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에서 2차전을 준비한다.
세가는 1995년 5월 11일(이날은 E3가 개최된 첫날이기도 했다)에 미국 판매를 시작했고, 소니는 1995년 9월 9일부터 미국 판매를 시작했다. 그리고 후일, 미국에서 플레이스테이션의 우위를 결정지었다고까지 평가되는 깜짝 발표가 처음 개최된 E3에서 이루어진다. 399달러로 가격이 발표된 세가 세턴과 달리 플레이스테이션의 가격을 299달러로 발표한 것이다.

세가 새턴은 플레이스테이션보다 먼저 출시됐고, 미국에서도 먼저 판매를 시작했다.

꼭 필요했던 게임쇼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 가격 발표는 E3의 위상을 알리는 가장 상징적인 예다. 1996년에 닌텐도가 닌텐도 64를 발표하고, 1999년에는 세가의 드림캐스트, 2000년에는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 2, 2001년에는 마이크로소프트의 Xbox, 닌텐도의 게임 큐브가 최초로 공개되는 등 이후에도 E3는 게임과 관련된 월드 프리미어 행사를 독차지하다시피 하며 세계 최대 게임쇼의 자리를 굳건히 지킨다.

299달러라는 깜짝 발표는 플레이스테이션의 흥행뿐만 아니라 E3의 흥행으로까지 이어졌다.

성공적인 출발 덕분이기도 하지만, E3가 제대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메가 게임쇼가 꼭 필요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최고의 성수기인 연말 시즌을 대비해 게임 업계는 치밀한 준비 과정을 거친다. 어떤 게임을 출시할 것인지, 어떤 판매 전략을 세울 것인지, 유통 과정에서 도매점, 소매점과 어떻게 협업할 것인지, 그리고 소비자에게 어떻게 어필할 것인지 등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 그러므로 게임사에 있어 이 모든 준비에 필요한 업계 관계자들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메가 게임쇼는 거부할 수 없는 행사다.
그리고, 게임과 관련된 소식을 접할 수 있는 정보가 인쇄 매체에 국한됐던 당시에 소비자들에 대한 프로모션은 6개월 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잡지를 통해 기사를 배포하거나 광고를 게재하면서 관심도를 끌어올리기에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5월(또는 6월)에 열리는 게임쇼는 연말에 판매할 게임을 본격적으로 알리기 시작하는데 안성맞춤의 타이밍이다.

1995년 즈음은 국내에도 게임 관련 잡지가 다수 존재했던 시점이다.

연말 출시를 예정한 게임은 이때 시연 등을 통해 소비자의 기대감을 끌어올리고 잡지 등의 매체에 기사 제공과 광고를 진행한다. 그리고 시간에 맞춰 CD 제작 스케쥴, 오프라인 매장 공급 일정을 철저하게 조절한다. 다른 게임사의 게임도 이때 출시가 집중되므로 조금만 삐끗하면 일정이 꼬이기 쉽기 때문이다.
이렇게 E3는 산업계의 시대적인 흐름과 게임사의 현실적인 필요성이 상승효과를 일으키며 크게 성장한다. 세계 최대의 시장인 북미에서 열리는 유일한 게임쇼라는 희소성도 한몫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