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전자가 출시한 MSX PC
1980년대는 세계뿐 아니라 한국 개인용 컴퓨터(PC) 산업의 여명기이기도 했다. 초창기에는 대기업과 벤처 기업의 구분이 없었다. 금성사는 동시기 닌텐도 게임기와 이름이 같은 ‘패미콤’을 주력 모델로 내놓았고 삼성전자는 SPC-1000으로 시장에 뛰어들었다. 1980년 이병태 박사가 동업자와 설립한 삼보컴퓨터는 SE-8001에 이어 애플Ⅱ 호환기종 트라이젬 20을 출시하며 선두로 나섰다.
이런 가운데 PC 시장 진출을 타진하던 대우전자는 MSX PC에 주력하기로 했다. MSX란 마이크로소프트와 일본 아스키가 주도하여 만든 8비트/16비트 PC 규격이다. 다만 주력은 16비트보다 8비트에 가까웠다. 인텔을 중심으로 주요 부품이 어느 정도 정리된 지금과 달리, 통일 규격이 없었던 당시에는 부품부터 소프트웨어에 이르기까지 메이커 별로 전혀 호환되지 않는 상황이 흔했다. 심하면 같은 회사의 기종도 세대별 호환이 불가능한 경우도 있었다. MSX는 이런 상황을 타개하고자 동일 부품을 쓰는 여러 회사의 PC라는 콘셉트를 내세웠다. 세계적인 규격이 되지 못하고 일본 회사 중심의 참여에 그쳤지만 그것만으로 신선한 것이었다. 1983년 컴퓨터사업부 신설 이후 대우전자가 내놓은 대표적인 MSX 기종을 돌아보자.
아이큐-1000/2000: 아이큐 시리즈는 1984년 출시된 대우 MSX PC의 첫 타자다. 1984년 아이큐 1000, 1986년 개선판인 아이큐 2000이 나왔다. 주 저장장치로 카세트테이프를 활용했고 복잡한 네이밍 대신 학부모 층에 어필할 만한 단어를 택한 것이 특징이다. 다른 포맷에도 발을 걸치고 있던 금성사·삼성전자와 달리, 후발주자로서 자체 기술력이 부족하여 MSX에 올인할 수밖에 없었던 대우전자는 공격적인 마케팅을 통해 아이큐 시리즈로 한국 8비트 PC 시장 대부분을 장악하는 성과를 냈다. 그러나 이런 올인 전략이 이후 16비트 시대에 들어와 경쟁력이 약화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 시절 MSX를 썼던 모두가 한 번쯤 들어봤을 모델이다.
재믹스: 80년대 초반을 기점으로 컴퓨터 관련 산업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대량 발주 대량 구매가 원칙인 칩이 기술 혁신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악성 재고로 남아도는 경우가 생겼다. DRAM의 재고로 고민하던 대우전자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MSX1 규격 개인용 컴퓨터를 기반으로 하여 부가 기능을 삭제하고 게임 기능만 남겨 1985년 12월 '재믹스'라는 이름으로 발매했다. 많은 PC가 그랬듯 MSX PC도 게임을 즐기기 위해 구매하는 일이 많았는데 아예 닌텐도 패미컴처럼 게임기로 포지셔닝한 것이다.
원래 칩이 소진되면 바로 단종키로 했지만 예상외의 인기를 끌어 오각형 케이스의 재믹스V, 우주선을 연상시키는 재믹스 터보까지 출시되는 등 장수했다. 지금도 동호회를 중심으로 복각 제품이 출시되는 등 매니아층에서 인기가 여전하다. 나중에는 독자기술 발전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재믹스 후기형에 들어가는 DW64MX1이 대우 컴퓨터 전용으로 처음 설계해 개발한 칩이다. 월간 GAMER'Z 2020년 4월호에 실린 강병균 씨 인터뷰(대우전자 근무)에서 밤낮없이 개발에 몰두했던 당시 개발팀의 문화를 읽을 수 있다.
X-Ⅱ: 1987년 출시된 MSX2 규격의 X-Ⅱ(CPC-400/400S)는 풀 모델 체인지 수준으로선 대우 MSX의 마지막 신제품이다. X-Ⅱ는 기존 MSX 기종의 키보드+본체 일체형 디자인에서 탈피하여 IBM 호환기종과 유사한 분리형 디자인으로 나왔고 다른 제품과 다르게 입력된 영상에 자막을 넣어 재출력이 가능한 슈퍼 임포즈라는 기능을 탑재했다. 현재 잔존 개체도 적지 않아 올드 컴퓨팅 동호인들 사이에서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MSX 기종들은 한국과 일본 제조사를 중심으로 80년대에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세계 시장의 흐름은 이와 달랐다. 90년대 들어와 PC 초창기의 혼란이 점점 가라앉고 대부분의 PC가 IBM 호환기종 중심으로 통일되면서 MSX가 설 자리는 사라졌다. 한국의 가전 3사 역시 MSX 관련 사업부를 없애거나 단계적으로 타 부서로 이동시키는 작업을 거쳤다. 그러나 MSX 기종의 발매가 중단됐다고 해서 그 역사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대우전자가 주로 만들었던 MSX는 아직 많은 이들의 가슴속에 남아있다. 마니아들이 정리한 MSX 관련 내용은 2021년 일본에서 'MSX & 재믹스 퍼펙트 카탈로그'라는 이름으로 출판되기도 했는데, 한국판 번역은 월간 GAMER'Z 수석기자인 조기현 씨가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