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와 한글: 한글 기계화, 공병우, 한재준

컴퓨터와 한글: 한글 기계화, 공병우, 한재준
1970년대 공병우 한/영 타자기 신문광고

현대 사회가 원활히 돌아가려면 문자의 효율적인 입력·처리가 필수다. 타자기의 발명과, 그 뒤를 이은 개인용 컴퓨터의 보급으로 인해 이들 기계에서 한글을 구현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이 개념은 소위 ‘한글 기계화’라고 불렸다. 알파벳과 비교 시 한글 기계화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받침의 존재다. 자소를 일렬로 나열하는 풀어쓰기 방식의 알파벳은 타이핑하는 만큼 수평으로 계속 이동하면 되지만 받침이 있는 한글은 아래쪽으로 갔다가 다시 원위치하는 복잡한 과정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오랫동안 한글 타자기는 나오지 못했다.

독특한 방식으로 실마리를 푼 인물은 한국 최초의 안과 전문의인 공병우(1906-1995)였다. 서울 종로구 서린동에 공안과를 차려 환자를 보던 공병우는 1938년 병원을 찾은 한글학자 이극로와의 만남을 계기로 한글과 한글 기계화에 관심을 두게 된다. 무엇이든 한번 시작하면 끝을 볼 정도로 빠져드는 성격을 지닌 공병우는 본업을 소홀히 할 정도로 연구에 매진하여 결국 한글 타자기를 완성했다. 보통 영문 타자기는 찍히는 면이 1개인데, 찍히는 가이드를 하나 더 두는 일명 쌍초점 방식을 개발함으로써 효율적인 받침 타이핑을 구현했다. 이때 찍혀 나오는 한글의 모양은 일반적인 인쇄용 서체와 달리 받침만 아래쪽에 가서 붙음으로써 받침의 종류와 유무에 따라 글자 아랫선이 들쭉날쭉한 형상이었다. 글쇠 배치와 모양에서 초성·중성·종성 3개의 구분을 명확히 하여 빠른 속도를 구현, 세벌식 ‘속도 타자기’라는 별칭이 붙은 공병우의 한글 타자기는 한국전쟁 휴전협정문 작성에도 사용됐다.

공병우 한/영 타자기

승승장구하던 공병우 타자기는 정부의 외면으로 인해 결정적인 시련을 맞는다. 제품이 원활히 보급되려면 표준 자판으로 채택되는 것이 중요하다. 표준이 아닌 제품을 굳이 쓸 사용자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부는 1969년 공병우식과 김동훈식 5벌 자판을 섞은 4벌 자판을 타자기 표준으로, 인쇄전신기용은 두벌식 자판을 표준으로 채택했다. 공병우 타자기는 속도가 빠른 대신 글자가 약간 투박했고 김동훈 타자기는 타자 효율성은 공병우식에 비해 떨어졌지만 글자 모양이 더 미려하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1982년에는 타자기에 이어 컴퓨터 표준 자판까지 두벌식으로 지정됨으로써 공병우의 세벌식 자판은 소수만이 사용하는 비주류 자판으로 남게 됐다.

그러나 공병우는 포기하지 않고 이후 종로구 와룡동의 한 건물에 한글문화원이라는 공간을 차려 1995년 사망할 때까지 세벌식 자판의 개선판을 연구했다. 가장 많이 알려진 배열은 3-90, 그리고 ‘공병우 최종 자판’이라 불리는 3-91이 있고 공병우의 사상을 이어받은 연구가들이 추가로 개발한 신세벌식, 3-2012 등의 배열도 있다. 1990년대 초반에는 한글문화원 한쪽 귀퉁이에서 신진 프로그래머였던 이찬진, 정내권 등이 우리 사무 환경을 바꾼 워드프로세서 한글을 개발했으니 여러모로 의미가 깊은 공간이다. 빌딩 자체는 지금도 큰 외장 변화 없이 그대로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및 동 대학원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한글 디자이너 한재준은 1980년대 후반 공병우와 만나면서 받침이 아래로 빠져나온 세벌식 조합형 한글 디자인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한글 서체는 2가지가 있다. 공한체와 한체가 그것이다.

공병우와 한재준의 성을 딴 공한체는 세벌식 조합형 한글을 바탕으로 명조체에 들어가는 돌기를 적용하여 서적 본문에 쓰일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반면 손글씨의 흔적이 없는 단순한 고딕인 한체는 공병우가 만든 한글 직결식 글꼴과 유사한 디자인을 하고 있는데, 아마 직접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공병우의 한글 타자기에서 시작된 세벌식 자판과 조합형 서체는 타자기를 넘어 컴퓨터 시대가 도래한 지금도 사회 각지에서 부분적으로 활용되며 독립된 줄기를 형성하고 있다.

한체와 공한체

세벌식 조합형 한글은 받침이 아래로 빠져나옴으로써 불규칙한 글자 아랫선을 형성, 가상의 네모틀에 전부 들어가는 기성 서체를 탈피했다는 이유로 탈네모틀이라고도 불린다. 탈네모틀 한글은 가독성이 떨어져 주류로 쓰이기엔 무리가 있지만 한글 디자인 원리를 익히기 위한 교육용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기에, 대학교 시각디자인과의 관련 수업에서 활용되는 사례가 종종 눈에 띈다. 기술과 상호작용하는 한글 서체 디자인의 발전은 현재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