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장매체 변천사(3): 매체의 천하통일을 이뤘던 CD
콤팩트 디스크(Compact Disc). 우리가 CD라고 부르는 저장매체의 정식 이름이다. 디스크는 디스크인데, 어떤 것보다 콤팩트하다는 뜻일까? 여기에 탄생의 계기가 있다. CD는 크고 불편한 LP를 대체할 목적으로 필립스와 소니가 공동으로 개발하여 1982년 선보인 저장매체다. 처음에는 650MB의 데이터를 담을 수 있었고 이후 700MB까지 올라갔다.
이 새로운 매체는 여러모로 혁신적이었다. 기록된 정보를 레이저로 읽는 작동 원리상 바늘이 디스크를 긁으며 발생하는 잡음 발생 확률이 전혀 없었던 데다 지름 12cm의 디스크 안에 담을 수 있는 곡 길이가 74분에 달했다. 이 길이는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을 한 면에 온전히 담기를 원한 소니 사장 오가 노리오의 뜻으로 관철된 것이다. 필립스 측은 60분, 지름 11.5cm을 원했지만 결국 소니의 12cm 안이 채택됐다. ‘합창’ 길이 관련 에피소드는 초기부터 CD에 깊은 관심을 보였던 유명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주장이라는 얘기도 있다. 어쨌든 당대 첨단 매체의 개발을 좌우한 중요 요소가 클래식이라는 점은 흥미롭다. 한편 상업적으로 판매된 최초의 CD 음반이라는 타이틀은 1982년 10월 발매된 빌리 조엘의 〈52nd Street〉가 가져갔다.
CD는 물리적 변형의 위험이 있고 취급도 어려운 LP와 달리 보관이 쉽고 깨끗한 음질을 지녀 곧 오디오 시장의 왕좌를 차지했다. 이후 디지털 매체라는 장점을 살려 굳이 음악이 아니더라도 컴퓨터 파일이나 프로그램을 담는 용도가 추가되며 CD 시장은 확장일로를 걸었다. 트랙에 음악 정보 대신 데이터를 기록하는 CD-ROM의 등장이 그것이다. 수많은 프로그램과 게임 유통 매체가 CD-ROM 하나로 정리되어 갔다. 사용자가 정보를 기록할 수 있는 빈 CD(CD-R)도 따로 판매되어 여러 마니아를 즐겁게 했다. 1990년대 한창 컴퓨터를 즐긴 세대라면 빈 CD에 정보를 기록한다는 뜻을 지닌 관용어 ‘굽는다’는 표현이 익숙할 것이다. 초창기 레코딩 프로그램을 이용해 막 기록을 마친 CD는 열로 인해 약간 뜨거웠기 때문이다.
비디오 게임기 시장에서도 기존의 롬 카트리지보다 제작 공정이 단순하고, 제작 비용도 저렴하고, 용량도 훨씬 큰 CD-ROM의 잠재력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1994년 나온 소니의 게임기 플레이스테이션은 CD-ROM을 재생 매체로 하여 대성공을 거둔 대표적 제품이다. 이런 상황이니 1990년대 초반에서 2000년대 중반에 출시된 랩톱과 데스크톱 본체에는 CD 드라이브가 필수 탑재 장비로 대접받았다. 간혹 90년대 중반의 매킨토시 본체처럼 CD 드라이브가 있어야 할 자리에 조금 더 큰 슬릿이 뚫린 것을 볼 수 있는데, 캐디(Caddy)라고 하여 CD를 넣은 플라스틱 보조 케이스를 통째로 삽입하는 방식이다.
매체가 있으면 재생기도 있어야 하는 법. 곧 CD플레이어(CDP) 라고 이름 붙은 전용 재생기기가 등장했다. 1984년 소니가 출시한 세계 최초의 휴대용 CDP인 디스크맨(Discman) D-50은 카세트테이프를 재생하는 형제 기기 워크맨처럼 다양한 디자인과 라인업으로 가지를 뻗으며 CDP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2000년대 초반에는 한국 브랜드인 아이리버가 출시한 IMP시리즈도 빼놓을 수 없다. IMP-350과 400, 550 등은 초창기 아이리버의 이름을 널리 알린 명품들이다. 정해진 CD만 재생할 수 있는 CDP는 보안상의 특성으로 인해 한동안 한국의 전방 군부대에 반입할 수 있는 유일한 음원 재생 매체이기도 했다. MP3플레이어는 녹음이 가능하지만 CDP는 보통 불가능하다는 이유였다.
이렇게 화려한 이력을 지닌 CD의 시대도 이제는 저물고 있다. 200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디지털 음원이 업계의 대세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날로그 매체가 없어도 디지털화된 음원 파일의 손쉬운 취급 유통이 가능해졌다. MP3플레이어나 스마트폰만 있으면 수천 수만 곡을 제한 없이 내려받아 즐길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여기까지는 LP의 퇴조와 비슷하다. 그러나 LP에 비해 한참 떨어지는 아날로그 감각이 CD의 단점이다.
LP를 밀려나게 한 거대한 크기와 귀찮은 관리 과정이 이제는 오히려 물성의 재현으로 각광받고 있다. 하지만 작은 광학 매체인 CD에서 그런 손맛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데이터 보관이란 측면에서도 비교할 수 없이 압도적인 용량을 지닌 USB 메모리가 있다. 세계적으로 2,000억 개 이상 판매된 것으로 알려진 첨단기술의 총아 CD는 이제 중간에 낀 애매한 매체로 전락했다. 아직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나 이대로라면 멸종을 피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CD의 부활은 가능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