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을 떠난 스티브 잡스의 다음(NeXT)은? 넥스트 컴퓨터

애플을 떠난 스티브 잡스의 다음(NeXT)은? 넥스트 컴퓨터

스티브 잡스는 개인용 컴퓨터라는 선견지명을 발휘하여 이른 나이에 세계적인 부와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그의 탁월함은 독선적이라는 그림자도 함께 지니고 있었다. 잡스의 판단이 모두 맞는 것도 아니었다. 소음을 싫어하던 그가 개발 중이던 애플 Ⅲ에 냉각팬 탑재를 금지함으로써 본체에 치명적인 내구성 결함을 지닌 채 출시된 것은 유명한 일화다. 후속모델인 리사 역시 실패했으며, 1984년 출시된 매킨토시는 많은 주목을 받았지만 기본 용량이 부족하고 속도가 느려 곧 판매량이 정체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잡스의 고집으로 매킨토시 역시 냉각팬이 없는 채로 출시됐다. 이는 필연적으로 잦은 고장을 불러왔다.

애플은 과도기에 있었다. 그리고 실적 부진에 대해 누군가는 이에 책임을 져야 했다. 독선적인 언행으로 사내에 적을 많이 만든 잡스가 도마 위에 올랐다. 존 스컬리와의 파워게임에서 패한 그는 1985년 애플에서 쫓겨났다. 이후 잡스는 애플을 능가할 수 있는 자신만의 컴퓨터 회사를 다시 만들기로 결정했다. 그와 뜻을 같이한 일부 직원들이 애플을 퇴사하고 잡스를 따랐다.

회사의 이름은 넥스트(NeXT)로 정해졌다. 왼쪽으로 살짝 기울어진 정육면체 위에 회사명이 쓰인 독특한 심벌 디자인은 미국 그래픽 디자인의 전설 폴 랜드(1914-1996)가 맡았다. 랜드는 회사명 중간의 e만 소문자로 처리했는데, 그에 따르면 이 e는 교육(education), 탁월함(excellence) 등을 뜻했다. 그는 잡스 못지않게 고집이 센 인물이었다. 그런 두 거장이 회사의 얼굴이 될 로고 디자인에 무난하게 합의했다는 것은 좋은 징조로 보였다.

잡스와 개발팀은 곧 회사의 주력 제품이 될 개인용 워크스테이션 개발에 착수했다. 외장 디자인은 그 안에 들어갈 부품만큼이나 중요하게 다뤄졌다. 신제품의 본체는 잡스의 신념에 따라 검은색 정육면체를 고수했다. 모니터 지지대의 기울기도 세심하게 고려됐다. 디자인에 신경 써서 나쁠 것은 없지만, 문제는 회사에 수익을 안겨 줄 제품 출시가 잡스가 내건 까다로운 조건 탓에 계속 지연됐다는 사실이다.

우여곡절 끝에 1989년 중반 시판에 들어간 넥스트 큐브와 보급형인 넥스트 스테이션은 그럼에도 매력적으로 느껴질 만한 요소가 충분했다. 디자인은 아름다웠으며 사양은 높았다. CPU로 모토로라 68030을 탑재하고 기본 8MB의 메모리를 제공했다. 운영체제(OS)도 혁신적이었다. GUI(Graphical User Interface)를 채택한 넥스트 PC 전용 OS인 넥스트스텝(NeXTSTEP)은 애플의 그것과 비슷했지만 더욱 진보된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번에도 발목을 잡은 것은 판매량이었다. 천문학적인 가격을 자랑하는 넥스트의 제품은 다른 컴퓨터와 호환되는 소프트웨어도 별로 없었다. 관객들은 잡스의 퍼포먼스에 열광했지만 박수갈채를 보내는 것과 지갑을 여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였다. 결국 넥스트는 1990년대 초 하드웨어 제조를 중단하고 넥스트스텝 OS의 판매에 주력하게 된다. PC 산업을 열어젖힌 이래로 항상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매끄러운 통합을 꿈꿨던 잡스는 이런 상황에 불만을 토로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한편 애플은 위기에 처해 있었다. 애플은 잡스가 떠난 후 한동안 그래픽 분야의 우위를 발판 삼아 자신만의 시장을 그럭저럭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몇 년 후 매킨토시에 뒤졌던 마이크로소프트가 매킨토시의 핵심 시장을 타격하기 시작했다. 마이크로소프트 회심의 역작 Windows 95는 ‘시작’ 버튼으로 대표되는 GUI를 전면 적용함으로써 매킨토시가 갖고 있던 시각적인 우위를 전부 따라잡았다. 그리고 매킨토시 중심으로 출시되던 그래픽 소프트웨어도 이제 Windows를 고려하기 시작했다. 매킨토시를 선택해야 할 이유가 사실상 사라진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Windows에 맞설 새로운 OS의 개발도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1997년 1/4분기에만 7억 달러의 손실을 기록한 애플의 운명은 풍전등화였다. 결국 애플 경영진은 넥스트를 인수하는 방식으로 잡스를 복귀시키기로 결정한다.

10여 년에 걸친 외유는 잡스를 단련시켰다. 번뜩이는 창의력과 함께 말도 안 되는 것들을 고수함으로써 실패를 자초하던 청년 잡스는 높은 기준을 유지하면서도 더욱 기술적인 컨트롤이 가능한 인물로 변모했다. 이로부터 현재 우리가 아는 애플 제품의 혁신이 시작된다.

넥스트라는 이름은 컴퓨터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모든 것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2001년 데뷔한 매킨토시 전용 운영체제 OS X는 넥스트스텝을 바탕으로 만들어져 이전의 매킨토시 OS와 공통점이 없다. 그리고 OS X는 macOS로 이름이 바뀌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거대한 맥 생태계를 움직이는 핵심 DNA에 넥스트가 녹아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