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의 흑역사를 대표하는 대표적 기기: 뉴턴, 퀵테이크, 피핀
오늘날 애플은 본업인 컴퓨터와 스마트 디바이스를 모두 성공적으로 출시하며 세계에서 가장 유력한 IT 기업 중 하나로 자리를 굳히고 있다. 그러나 애플에도 위기는 있었다. 1980년대 말부터 회사가 혁신적인 제품 대신 근본 없는 고가 정책과 방만한 라인업에 주력하면서 시작된 위기는 1990년대 중반 절정에 달했다. LC, 퍼포마, 쿼드라, 센트리스 등 이름만 다르고 큰 기능적 차이가 없는 매킨토시 라인업이 난립하는 동안 최대 라이벌 마이크로소프트는 매킨토시의 장점인 GUI(Graphic User Interface)와 그래픽 성능을 거의 따라잡은 운영체제 Windows95를 내놓아 애플을 존폐의 위기로 몰고 갔다.
회사가 흔들리면 신제품의 개발과 출시 방향도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애플 운영체제는 자사 하드웨어에만 쓰인다는 법칙을 벗어나서 타 PC 제조사에도 기회를 주기 위해 논의됐던 매킨토시 클론 정책이 대표적이다. 또한 하드웨어 개발 부문에서는 컴퓨터가 아닌 다양한 제품으로 외도를 시도했지만 성공한 것은 거의 없었다. 애플 혼란기에 나온 주요 제품 중 그나마 기억할 만한 것은 뉴턴 메시지패드, 퀵테이크, 피핀 앳마크가 있다.
1993년 공개된 뉴턴(Newton) 메시지패드는 개인용 정보 단말기(PDA) 시장을 노리고 개발된 기기다. 당시 애플 CEO였던 존 스컬리가 주창한 ‘지식 탐색기’ 개념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뉴턴은 주소록과 스케줄 관리, 메모가 가능했고 스타일러스 펜으로 화면에 글을 쓸 수도 있어 당대 기준으로 혁신적인 기기임에 분명했다. 그러나 초창기의 기술은 보통 문제점도 동반하고 나타난다. 주요 장점으로 내세운 필기 인식의 성능이 부실하여 사용자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배터리나 무게에서도 이점이 없었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생태계 형성에 꼭 필요한 관련 애플리케이션이 다양해야 하는데 그런 것도 아니었다. 저해상도 흑백 디스플레이를 채택하고 애플리케이션도 없는데 가격은 애플답게 최대 1,500달러에 달했으니 성공하기 어려운 조건만 갖춘 셈이었다. 그나마 뉴턴은 다른 실패작과 달리 아이폰/아이패드의 머나먼 선조로 재평가되기도 한다. 자체 개발한 칩셋은 이후 애플이 채택한 ARM 프로세서의 시초가 됐고, 스타일러스 펜은 애플 펜슬의 시초로 볼 수 있다.
애플과 코닥의 합작으로 1994년 탄생한 디지털카메라 퀵테이크(QuickTake)는 아마 실패작으로 꼽히는 모델 중에서도 가장 존재감이 적을 것이다. 전원은 AA 배터리를 사용했고 이미지 센서는 640×480 픽셀의 해상도를 구현했다. 촬영한 이미지는 매킨토시에 연결해서 인식할 수 있었다. 1995년 출시된 퀵테이크 150은 최대 4MB의 스마트 미디어 카드에 32장의 이미지 저장이 가능했다. 1997년 출시된 마지막 모델 퀵테이크 200은 후지필름과의 합작으로 제작되는 등 모델 주기 동안 합작사가 바뀌며 라인업 자체가 전반적으로 표류했다.
퀵테이크는 아직 기록매체로 필름이 주효하던 시대에 디지털카메라의 미래를 제시한 선구자격 제품임에는 분명하지만 시대를 너무 앞서간 개념과 부실한 성능이 소비자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아 조용히 단종됐다. 애플 컴퓨터에서 동작하는데 애플 컴퓨터의 점유율이 낮은 것도 부진의 한 이유였을 것이다. 다만 곡선이 가미된 진회색 바디에 현재의 디지털카메라와 비슷한 형태를 갖추고 애플의 컬러 심볼이 포인트 역할을 하는 퀵테이크 200은 수집가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한 레트로 디자인을 지녔다.
실패작을 꼽자면 애플과 일본 반다이의 협력으로 출시된 가정용 게임기 피핀 앳마크(PIPPIN ATMARK)도 빼놓을 수 없다. 1990년대 중반 닌텐도, 세가, 소니 등 주요 하드웨어 개발사의 경쟁으로 시장이 뜨거워지자 새로운 시장을 물색하던 애플 또한 이 전쟁에 참전하고자 했다. 마침 반다이 역시 CD-ROM에 기초한 멀티미디어 바람을 타고 시장 확대를 노리고 있었다. 1994년 피핀 규격의 공개에 이어 매킨토시를 다운그레이드하여 만든 32비트 콘솔 게임기 피핀 앳마크가 1996년 선보였다. 그러나 전문 게임기보다는 PC의 열화판에 가까웠던 피핀 앳마크는 처음부터 험난한 운명을 안고 태어났다.
피핀의 본체 디자인은 CD 삽입구가 위쪽으로 열리는 타 게임기와 달리 데스크톱 본체에서 CD-ROM 드라이브만 떼어 놓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는 실제 기능적 차이는 없었을지 몰라도 PC와의 차별화에 실패함으로써 결국 조기 단종된 피핀의 운명을 상징하는 디자인이 됐다. 게임기 케이스는 고유의 모습으로 꿈과 환상을 심어줘야 하는데 축소된 PC를 구입한다는 인상을 갖게 만든 것이다.
피핀의 장점인 네트워크 기능과 모뎀 장착, 그리고 키보드, 마우스, 프린터를 연결할 수 있는 확장성은 PC에서 가능하기에 PC를 가진 고객이라면 굳이 새로운 기기를 구매할 이유가 없었다. 이미 플레이스테이션, 새턴, 닌텐도64처럼 강력한 라이벌이 다수 존재하는 시장에서 마케팅 총력전을 펼쳐도 모자랄 판에 피핀 앳마크의 판매는 기존 게임기의 판매 방식과는 다른 복잡한 구조로 이뤄졌다. 더구나 이번에도 애플의 고가정책이 발목을 잡았다.
결국 피핀은 반다이의 CEO까지 실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게 만든(1999) 비운의 기기가 됐다. 비슷한 시기인 1997년 애플에서도 CEO 길 아멜리오가 물러나고 스티브 잡스가 복귀했다. 애플이 시도했던 이런저런 외도의 흔적들은 잡스 복귀와 함께 정리됐다. 잡스가 복귀하자마자 애플이 집중해야 할 핵심 제품의 개념을 제시한 후 이에 벗어나는 잡스러운 라인업은 전부 단종시켰기 때문이다. 이후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애플의 역사가 시작됐다.